2018 오키나와

[오키나와 여행] 여행 사전준비 with 현대카드 라이브러리

똔따 2018. 12. 23. 20:22

나중에 현대카드 글도 쓰겠지만, 현대카드를 가지고 있으면 압구정 로데오에 위치한 트래블 라이브러리를 월 1회 무료 입장할 수 있다. 2011년 가족카드로 시작한 m3를 아직도 가지고 있는데, 트래블 라이브러리는 작년 처음 가보고 올해에는 자주 이용하고 있다. 흔히 서점에서 찾을 수 있는 프렌즈 시리즈 등을 비롯한 가이드 북은 물론이고 해외 서적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하지만 평일에는 오후 8시까지만 운영하기 때문에 퇴근하고 가면 가이드 북이나 휘리릭 보고 나가는 현실 ㅜㅜ



아무튼, 이번에도 오키나와 여행을 준비하러 들렀다. 가이드북으로 시작하면 좋은 것이, 정말 알아야 하는 최소한의 역사, 문화적 배경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프렌즈 오키나와도 책 뒷편에 세 네 페이지 정도 오키나와 관련 역사를 소개하고 있어 읽고 여행을 가는 것을 추천한다.



전에 한창 '그것은 알기싫다' 팟캐스트 한참 들을 떄에 오키나와 환타 님이 소개하신 오키나와 역사를 정말 재밌게 들었었는데, 알고보니 프렌즈 오키나와 저자가 오키나와 환타님!!!! 충격. 그래서 역사 파트가 더욱 와닿았다.

일단 제일 중요한 베이스는 오키나와가 일본에 편입(?)된지 200년이 채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1879년 류큐처분 때 일본에 강제로 편입되어 류큐왕국 즉 하나의 나라였던 것이 오키나와 '현'으로 강등되었다. 그러면서 류큐어가 사용 금지되고 이름도 현재 일본식 이름으로 창씨개명을 진행했다. 이런 베이스를 알아야 일본 본토와는 다른 스타일의 음식이 이해가 되는 것이다. 현재의 오키나와 사람들 중에도 본인이 오키나와인이지 일본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비율이 상당히 높다.

책의 내용을 시대별로 정리하면.

​​1. 역사 이전 시대

약 3만 2천년 전부터 사람의 흔적은 있었음. 그리고 중국, 한반도, 일본 본토, 오키나와가 육지로 연결되었던 2만년 전의 고대문명설이 정설로 받아들여지는 추세.

610년: 중국 수나라 해군 제독에 의해 오키나와의 존재가 외부로 알려짐. 식인문화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음.

616년: 류큐인 30명이 일본으로 건너가 영주했다는 기록이 있음.



​​2. 구스쿠 시대

12세기 이후: 원시형태의 국가 발생. 성곽 건축이 등장했으며 농경사회 출현.

14세기: 오키나와 본섬의 세력이 남산, 중산, 북산의 삼산시대로 나뉨. 이 중 나하중심의 중산은 조선과 사대관계 있었음.



​​3. 류큐왕국 시대

1429년: 나하에 기반을 둔 쇼하시에 의해 삼산시대 통일. 그 후 류큐왕국 탄생. 중국, 조선, 일본, 말레이 반도의 말라카와 무역을 하는 중계무역 국가로 번영. 그 시대 일본은 100년의 전국시대를 끝내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 통일. 류큐왕국은 통일 후 바로 노일전쟁에 나선 일본 막부의 쌀 공출 명령을 거부했는데, 조선과의 관계를 이유로 듬.

노일전쟁 이후에 일본 막부는 사쓰마 번의 류큐침공을 허용함.



4. 사쓰마 지배시기

신무기 조총을 든 항정 80척, 3000명의 사쓰마 병력에 연전연패한 류큐왕국. 일주일만에 항복했지만, 중국과의 조공무역 과실을 가져가기 위해서 사쓰마가 류큐왕국을 존속시킴.

이시기 막부>사쓰마번>류큐왕국>오키나와 본섬>미야코제도 등 섬들 순서로 다중지배 구조였다.

* 인두세: 류큐왕국은 일본에 존속된 이후 할당량을 책임지려 오키나와 본섬 이외의 섬들에서는 인두세를 거뒀다. 이에 미야코제도는 과도한 세금을 피하기 위해서 임산부를 살해하거나, 마을모임의 지각한 사람을 죽였다.

* 해초류: 이런 수탈을 참지 못한 섬사람 일부는 탈출을 강행했는데, 그것을 막기 위해서 배타는 행위 자체가 금지되었다. 어업으로 벌어먹던 섬사람들은 배를 타지 못하게 되자 해초류를 먹게 되었다. *오키나와에 해초류 요리가 발달하게 된 이유* 이 시기 자색고구마가 오키나와에 유입되어, 쌀을 세금으로 수탈당하고도 자색고구마를 먹으며 아사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

* 사탕수수: 사쓰마가 오키나와를 주목한 이유 중 가장 큰 사탕수수. 식민지의 대규모 농장은 오키나와의 사탕수수 농장이 거의 최초의 사례이다. 오키나와 사람은 사쓰마에 쌀을 비싸게 사먹고 사탕수수는 헐값에 파는 수밖에 없었다. 세금은 또 살로만 걷었다. 사탕수수무역으로 떼돈을 번 사쓰마는 후에 메이지 유신 때 막부까지 무너뜨릴 힘을 갖게 된다.



​​5. 1879년 류큐처분: 일본이 제국주의로 가는 첫걸음

1868년: 막부가 붕괴되고 천황이 일본을 지배하게 됨.

1876년: 조선의 강화도 조약 체결

1879년: 160명의 경찰과 400명의 군인으로 오키나와는 일본에 강제편입됨. 그리고 왕국에서 오키나와 현으로 격하됨. 류큐어는 금지되고, 창씨개명을 강요당함. 류큐왕국의 패망을 오키나와 본섬은 슬퍼했지만 인두세로 고통받던 부속 섬사람들은 내심 기뻐했다. 하지만, 인두세는 사라지지 않고, 오키나와 본섬에서 일본으로 납부하게 될 뿐이었다.

1910년: 조선 멸망



​​4. 철의 폭풍

1941년 12월: 일본의 하와이 진주만 기습. 6개월 후 미드웨이 해전 대패 후 열세로 몰림. 미국의 물량공세에 밀림.

1945년: 4월 1일 미국의 오키나와 상륙. 인구 1인당 6발의 포탄일 정도로 수많은 포탄을 쏜 끝에 6/20 오키나와 점령. 오키나와 전투로 미군을 질리게 하려는 일본의 목표를 달성함. 하지만 그 여파로 미국은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원폭을 쏨.



5. 미국령 오키나와


1972년: 종전 후 오키나와는 일본에 반환되지 않고 1972년까지 미국의 지배하에 있었음. 1950년 한국 전쟁시 오키나와가 미국의 주요 병참기지 역할을 함. 베트남전에서는 오키나와 기지에서 뜬 b52 폭격기로 폭탄과 고엽제를 살포함. 미국령 시기에 오키나와에는 자가용 위주의 문화가 확립되고, 정크푸드가 확산되어 장수지역이라는 과거의 영광은 사라지고 점점 단명지역화 되어가는 중.



6. 일본 복귀

1972년: 69년 일본과 미국이 반환을 합의하고 72년에 반환됨.

오키나와 면적은 일본 국토의 0.6%에 불과한데 일본 내 미군기지의 70%를 차지하고 있음. 일본 장기 집권중인 자민당은 물론 민주당도 오키나와의 요구를 묵사라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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